8대제학(八大提學) 문형(文衡) 배출

자신의 문벌(門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높은 벼슬에 있었던 조상의 수를 헤아리고 혹은 대과급제자의 수가 많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환자(科宦者)의 수는 정치적 혁명기의 처신이나 혹시는 집안에 왕비가 나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한 결과로 얻은 덤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소위 '세상이 알아주는 집안'이라 할 때는 그 벼슬보다는 훌륭한 학자인 석학거유(碩學巨儒)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였는가를 첫손으로 꼽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삼한갑족의 최상위로 광김연리(光金延李)를 손꼽는 까닭은 당대 학자로서 최고인 학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인 '대제학, 문형'이 8명 혹은 7명으로 조선조 제1, 2위였기 때문이다.

'문형'은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대제학'의 별칭인데, 학문의 권위가 높다고만 해서 되는 관직이 아니었다. '문형'이 되자면 문과 대과 급제자로서도 원칙적으로 호당(湖堂) 출신이라야만 가능했다. 조선조에서 '호당'이란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으로 젊고 재주 있는 문신(文臣)으로서 임금의 특명(特命)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을 가리키며 그러한 특전으로 학문을 하는 것을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였다.

'대제학'으로서도 '문형'의 별칭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한정되어 있었는데, 반드시 홍문관(弘文館) 대제학과 예문관(藝文館) 대제학 및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등 나라 전체의 학문 관련 세 가지 최고 직위를 모두 겸직하는 경우에 한하였다. 그리하여 '문형'은 위 3관(三館)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위이므로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로 여겼으며 품계(品階)는 비록 판서와 동등한 정이품(正二品)이었지만 삼공(三公) 곧 삼정승이나 육조(六曹) 판서보다도 높이 대우하였다. 또 조선조의 벼슬들은 국법에 따라 모두 임기의 기한이 있었는데, '문형'은 본인 의사에 따라 종신직이었다.

참고로 우리 역사상 여러 벼슬에서 최연소의 기록을 세운 이는 광주이씨(廣州李氏)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었는데, 20세에 문과에 오르고 23세에 호당에 들었으며, 31세에 문형이 되었고,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이었다.

참고 조선조의 '문형'은 도합 133명인데, 2명 이상을 배출한 씨족은 모두 29씨족이고, 5명 이상 배출한 씨족은 광산김 8명, 연안이씨 7명, 전주이씨 7명, 신안동김씨(장동김씨) 6명, 달성서씨 6명, 의령남씨 6명, 덕수이씨 5명 등 7씨족뿐임

조선 역사상 3대 대제학이 배출된 집안으로는 광김 사계 자손, 연안이씨 월사 가문(廷龜―明漢―一相) 외에도, 전주이씨 밀성군파(密城君派)의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자손으로 '敏서―觀明―徽之' 달성서씨 약봉(藥峯) 서성(徐)의 자손으로 '有臣―榮輔―箕淳(1791-1854)' 등이 또한 그러하였으니, 이 4 씨족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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